Tuesday, 12 June 2012
공포
양치질을 하기 위해 칫솔에 치약을 적당히 묻히고 수도꼭지에 손을 가져가던 순간이었다. 문득 샤워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쪽인지 모를 뇌의 한 구석에서 그런 신호가 '번쩍' 하는 사이, 내 손은 이미 수도꼭지를 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수도꼭지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칫솔 위로 물이 얌전히 흘러 나왔다. 전동칫솔에게 얼마간의 수고를 위탁하고, 조금 전의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공포'였을 것이다. 익숙한 기대가 배반당하는 순간, 우리들은 공포를 느낀다. 이를테면 당연히 저쪽 차선에서 나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기대하던 자동차가 갑자기 차선을 넘어 나를 향해 돌진해 온다면. 마땅히 오른쪽 주머니에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전화기 대신 주머니 속 먼지만 손 끝에 느껴진다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고 엔터키를 눌렀음에도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뻘건 글씨를 마주한다면. 단 한 번도,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렇게 행동 한다면.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덜컥 눈 앞에 닥친다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사려깊은 예측으로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공포'가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모든 위협과 위험을, 온갖 가능성과 우연의 마주침들을, 그 모든 순간의 조합들 속에 수시로 평범한 기대들이 어긋나는 상황을 예측하고 매번 '마음의 준비'를 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 우리 주위에 잠복해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얼굴을 들이미는 '공포' 앞에,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그렇고 그런 인간일 뿐.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번쩍'과 '수도꼭지' 사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주오던 자동차가 내 두 눈 앞으로 한 없이 빠르게 달려오는 순간.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기 전에 주머니의 '비어있음'이 어렴풋하게 느껴질 때. 엔터키를 누르고 화면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이 스쳐가는 손끝의 낯선 기운.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어쩌면 너무 늦게, 나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서 공포스러운 순간들.
수도꼭지를 다시 열었다. 졸졸 흘러나오는 물을 대충 손으로 받아 입을 헹궈냈다. 어딘지 통쾌했다. 얌전한 물줄기에 의해, 찰나의 공포가 어긋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탓이다. '배반당한 공포'쯤 되려나. 말하자면 '이중의 배반'인 셈이군. 거울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곧잘 배반당하는 어떤 기대들에 대해, 끊임없이 빗나가는 일종의 '예측'들에 대해 생각했다.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찬 순간들, 어쩌면 엇갈린 안도와 평화에 대해. 이 모든 '불완전함'에 대해.
당신도, 아마 나와 같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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