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6 April 2012
발걸음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괴롭다. 난 알콜흡수장애가 있는 남잔데. 흣. 도리어 또렷해지는 정신을 마주하기가, 참 부담스럽고 어색하다.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푸른 하늘은 비현실적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푸른하늘 따위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슬픈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하루종일 무언가를 꾸역꾸역 먹었다. 정갈한 한정식을 먹었고, 묵은지가 들어간 김치김밥을 먹었으며, 또 초장을 잔뜩 묻힌 회 몇 점을 먹었다. 배가 불렀지만 계속 먹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배가 부르면 어딘지 불쾌해지는 내가, 오늘따라 밉고 야속했다.
노래를 들었고, 예정에 없던 드라이브를 했다. 세차도 했고, 모처럼 창문을 열어 손을 내밀어 보기도 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웠지만, 그런대로 시원했다. 사람들은 각자 어디론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우린 움직여야 한다. 어디든, 향해서 가야만 한다. 결국, 모두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과 좌회전, 또는 유턴과 후진을 반복한다. 정해진 길은 없지만, 그 정해지지 않은 길을 따라 우리는 쉬지 않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가령 앞으로 가기 보다는 뒤로 돌아가고 싶을때라든지, 걸음을 떼려다가 무언가를 어딘가에 두고 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칠 때라든지, 혹은 누군가의 아픔을 스치듯 발견하고는 부풀려진 '정의감'을 발휘하고 싶어질 때라든지. 말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소리 없는 비명들이 가득한 이 잔인하게 차분한 땅에서, 난 밤 거리를 달리며 혼자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혹은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 모든 비명들에 미안해졌다. 그 모든 절규와 몸부림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부쩍 자신이 없어졌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그 알량한 '정의감', 혹은 '연민'이라 부를 어떤 애틋한 감정들의 이입. 그 모든 것들에 자신이 없어졌다. 우선 다시 한 번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겠다고 다짐했지만,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늘 그렇듯, 여전히 갈팡질팡, 우왕좌왕 하고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내 용기가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언젠가, 언제일지 모르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이라는 가정법을 떠올렸다. 아마 여전히 갈팡질팡, 우왕좌왕 하고 있을테지만. 그래도 그 땐 아마도 그 '사실'을 조금은 더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역시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조금씩 나는 발걸음을 떼고 있는 것 같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 길에 한 번쯤은, 다시, 너를.
Tuesday, 3 April 2012
오해
문득 어쩌면 모든 것들이 오해, 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오렌지의 껍질을 반쯤 벗겨냈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말없이 오렌지를 입에 밀어넣었다. 그러다가 이제와서 그 모든 것들이 오해, 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아니, 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믿을 수 있는 건지. 오해, 했다고 짐짓 오해하는게 혹시 더 큰 폭력은 아닌지. 등등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우걱우걱 오렌지를 씹어 먹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도 생각을 해야하고, 말을 해야 하고, 또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처 정돈되지 못한 싱크대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숙제들, 또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상한 마음이 채 아물기도 전에, 그렇게 아침이면 눈을 뜨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먹고 머리를 감고 어김없이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혼잡한 길을 따라 각자의 출근을 서두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밤 사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적어도 내 주위의 세계는 그럭저럭 평안을 유지하고 있으며, 누군가와의 점심 약속과 해야할 일이 있다는 그런 소소한 사실들에 안도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 못한 말들과 듣지 못한 말들, 그 모든 말들의 빈틈에 대해 생각했다. 그 비어있던 공간을, 허공을 부유하던 말들을, 서로 가닿지 못하던 마음들을 떠올렸다. 감히 오해, 라고 이름 붙이기 부끄러울 만큼, 너무나도 앙상했던 관계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즈음 나는 얇은 실 몇 가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양복 아랫단추를, 끝내 고쳐 달았었다. 그래. 그랬었지. 단추를 고쳐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었다. 버릇을 고치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무서운 일이었다. 빙빙 돌려가면서도 미처 꺼내지 못했던, 그런 무수한 단어들의 조합이 못내 아쉽고, 미안해졌다.
비가 내린다. 어제는 만우절, 이었고. 지난 주말에도 남쪽에는 비가 내렸었다. 구두가 온통 젖어 못쓰게 됐다. 전화기 한 대를 새로 마련했고, 몇 가지의 자잘한 물건들을 더 주문했다. 주소록을 뒤적이다가, 휴대폰 주소록에만 남아있는 이들에게 어딘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새 전화번호를 알리려던 계획은 일단 다음으로 미뤄두었다. 새 전화기에 익숙해질때 쯤이면, 아마 조금은 상황이 나아질지 모른다는, 그런 도무지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기대를 잠시 해보기도 했다. 혼자 피식 웃어버렸다.
머리카락은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내 표정없는 얼굴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며, 터벅터벅 화장실을 나섰다. 허무하고, 또야속했다. 밝게 웃으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 열정인지 열심인지 아니면 가식인지 모를, 혹은 그게 뭐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을, 그런 말들을 뜨겁게 내뱉는 사람들, 부지런히 제 손을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몸부림치던 그들. 그 모두에서 나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잠을 좀 자야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쨌든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조금 더 태연하게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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