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28 March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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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두 번이나 나는 경적을 울려댔다. 한 번은 택시, 한 번은 버스였다. 깜박이도 안넣고 눈치없이 끼어들게 뭐람. 오른 손에 든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가 출렁였다. 나는 경적을 울렸고, 그들은 잠시 비상등을 깜박이는 것으로 반응했다. 순간 깜박이를 왜 넣는 거냐는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을 떠올렸다. 아마 늦은 밤, 고속도로 위에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일련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내 오른 손은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 대신 다른 무엇을 붙잡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컴컴한 집으로 들어서자 온갖 무질서가 눈에 띄었다. 어딘지 문득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책과 잡지들, 포장도 채 뜯지 않은채 먼지만 쌓인 우편물들, 시간을 재촉하는 빨간 글씨가 박힌 각종 고지서들, 그리고 아마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숫자들로 가득한 영수증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을 때, "aus Bayern" 따위의 글자가 박힌 맥주를 뜯었다. 반 병쯤 마셨을 때, 이번에는 싱크대 위에 널려 있는 그릇들이 눈에 들어왔다. 뭘 먹었단 말인가.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고, 다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제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뜨거운 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면도는 하지 않았다.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는 생각처럼 달지 않았다. 하루종일 쓴 입을 다셨던 탓에, 달콤한 무언가를 원했던 나는 실망했다. 그러다가, 점원에게 샷을 하나 더 넣어달라고 말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난,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니, 어쩌면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는 '엑스트라샷'을 강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 맛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번에는 '엑스트라 샷'의 아메리카노든, '카라멜 마끼아또'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도 무중력의 시간들을 통과했던 것 같다. 수십 통의 메일과 문자를 읽었고, 누군가의 글을 훑었다. 나도 무언가를 썼던 것 같다. 그밖에 밥을 먹었고, 숨을 쉬었고, 말을 했고, 또 담배를 피웠다. 물을 마셨고, 인스턴트 커피를 두어잔 마셨으며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와 바이에른산 맥주를 마셨다. 청소와 설거지를 했고, 노래를 들었다.

오늘을 기록해야 겠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기록한다는 것, 오늘이라는 것. 모두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 기록을 남기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테지. 숫자들이 박혀있던 영수증을 다시 들춰본다. 그날 난 거기에서 무언가를 구입했구나.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을, 누군가의 미소를, 또 누군가의 시간을. 어쩌면 나는 기억을 샀는지도 몰랐다. 그 공기를, 추억을, 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있음'과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지성사 수업시간이었던 것 같다. 유난히 흰머리가 잘 어울렸던 선생님의 목소리와 표정이,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무언가가 있기 전에 '있음'이라는 게 있다고 했었지. 무언가 있으려면 무엇이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테니까. 무엇이 '없다'는 건, 그래서 아마도 '없음'을 전제하고 있을테지. 순간, 생생했던 기억이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있음'과 '없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과연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맥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안부를 잠시 걱정했다. 별 일없이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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