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24 June 2012

Monday's coming




Monday is coming. I think this one is going to be a very long one. Long long and very long. 

In a good way.


 

D_ D



Tuesday, 12 June 2012

공포



양치질을 하기 위해 칫솔에 치약을 적당히 묻히고 수도꼭지에 손을 가져가던 순간이었다. 문득 샤워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느 쪽인지 모를 뇌의 한 구석에서 그런 신호가 '번쩍' 하는 사이, 내 손은 이미 수도꼭지를 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수도꼭지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칫솔 위로 물이 얌전히 흘러 나왔다. 전동칫솔에게 얼마간의 수고를 위탁하고, 조금 전의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공포'였을 것이다. 익숙한 기대가 배반당하는 순간, 우리들은 공포를 느낀다. 이를테면 당연히 저쪽 차선에서 나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기대하던 자동차가 갑자기 차선을 넘어 나를 향해 돌진해 온다면. 마땅히 오른쪽 주머니에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전화기 대신 주머니 속 먼지만 손 끝에 느껴진다면. 으레 그랬던 것처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고 엔터키를 눌렀음에도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뻘건 글씨를 마주한다면. 단 한 번도, 그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렇게 행동 한다면. 기대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덜컥 눈 앞에 닥친다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사려깊은 예측으로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공포'가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모든 위협과 위험을, 온갖 가능성과 우연의 마주침들을, 그 모든 순간의 조합들 속에 수시로 평범한 기대들이 어긋나는 상황을 예측하고 매번 '마음의 준비'를 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겐 없다. 우리 주위에 잠복해 있다가 느닷없이 나타나 얼굴을 들이미는 '공포' 앞에, 우리는 보잘 것 없는 그렇고 그런 인간일 뿐.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은 '번쩍'과 '수도꼭지' 사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마주오던 자동차가 내 두 눈 앞으로 한 없이 빠르게 달려오는 순간. 오른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기 전에 주머니의 '비어있음'이 어렴풋하게 느껴질 때. 엔터키를 누르고 화면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이 스쳐가는 손끝의 낯선 기운.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 설명할 수 없는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 이미, 어쩌면 너무 늦게, 나름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서 공포스러운 순간들.

수도꼭지를 다시 열었다. 졸졸 흘러나오는 물을 대충 손으로 받아 입을 헹궈냈다. 어딘지 통쾌했다. 얌전한 물줄기에 의해, 찰나의 공포가 어긋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탓이다. '배반당한 공포'쯤 되려나. 말하자면 '이중의 배반'인 셈이군. 거울을 보며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곧잘 배반당하는 어떤 기대들에 대해, 끊임없이 빗나가는 일종의 '예측'들에 대해 생각했다.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찬 순간들, 어쩌면 엇갈린 안도와 평화에 대해. 이 모든 '불완전함'에 대해.

 당신도, 아마 나와 같았겠죠.



Sunday, 27 May 2012

어떤 아침



스르르 눈을 떴다.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땀은 흐르지 않고 있었다. 꿈이었다. 어딘지 퀴퀴한 냄새가 났다. 삐걱거리는 마루바닥이었는지, 단단한 시멘트 바닥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난 시선을 바닥에 내리 깔고 있었다. 이마와 등에서는 속절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그를 만난 난 당황했다.

예상했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내 반응은 똑같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입 안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맴 돌았다. 벌써 몇 번째, 꿈 속에서 만난 여러 차례의 '기회'를, 난 잡지 못했다. 한숨이 나왔다. 꿈에서가 아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어쨌든 단 한 번도, 그와 우연히라도 마주치지 않은 건 기이한 일이었다.

나보다 먼저 잠에서 깬 라디오에선 이른 아침의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젯밤에는 영등포고가도로에서 3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고 했다. 탑승자 모두는 '중상'이라고. 마주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발생한 사고라고 했다. 음주운전 또는 졸음운전 가능성을 수사한다고도. 늘 지나다니던 그 길에서 그동안 내가 만난 모든 맞은편 운전자들에게 감사했다.

문자와 메일함을 훑었고, 몇 개의 답장을 보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너무 많은 일들을 처리한 건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토마토를 갈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시락도 준비해야 하는데. 몸을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첫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Friday, 6 April 2012

발걸음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괴롭다. 난 알콜흡수장애가 있는 남잔데. 흣. 도리어 또렷해지는 정신을 마주하기가, 참 부담스럽고 어색하다.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푸른 하늘은 비현실적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푸른하늘 따위는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슬픈 일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하루종일 무언가를 꾸역꾸역 먹었다. 정갈한 한정식을 먹었고, 묵은지가 들어간 김치김밥을 먹었으며, 또 초장을 잔뜩 묻힌 회 몇 점을 먹었다. 배가 불렀지만 계속 먹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배가 부르면 어딘지 불쾌해지는 내가, 오늘따라 밉고 야속했다.

노래를 들었고, 예정에 없던 드라이브를 했다. 세차도 했고, 모처럼 창문을 열어 손을 내밀어 보기도 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웠지만, 그런대로 시원했다. 사람들은 각자 어디론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 우린 움직여야 한다. 어디든, 향해서 가야만 한다. 결국, 모두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과 좌회전, 또는 유턴과 후진을 반복한다. 정해진 길은 없지만, 그 정해지지 않은 길을 따라 우리는 쉬지 않고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가령 앞으로 가기 보다는 뒤로 돌아가고 싶을때라든지, 걸음을 떼려다가 무언가를 어딘가에 두고 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칠 때라든지, 혹은 누군가의 아픔을 스치듯 발견하고는 부풀려진 '정의감'을 발휘하고 싶어질 때라든지. 말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소리 없는 비명들이 가득한 이 잔인하게 차분한 땅에서, 난 밤 거리를 달리며 혼자 '상쾌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혹은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 모든 비명들에 미안해졌다. 그 모든 절규와 몸부림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부쩍 자신이 없어졌다. 한껏 부풀어 올랐던 그 알량한 '정의감', 혹은 '연민'이라 부를 어떤 애틋한 감정들의 이입. 그 모든 것들에 자신이 없어졌다. 우선 다시 한 번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겠다고 다짐했지만,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너무 많은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서, 늘 그렇듯, 여전히 갈팡질팡, 우왕좌왕 하고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내 용기가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언젠가, 언제일지 모르는 그 시간이 다가오면, 이라는 가정법을 떠올렸다. 아마 여전히 갈팡질팡, 우왕좌왕 하고 있을테지만. 그래도 그 땐 아마도 그 '사실'을 조금은 더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역시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조금씩 나는 발걸음을 떼고 있는 것 같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 길에 한 번쯤은, 다시, 너를.


Tuesday, 3 April 2012

오해



문득 어쩌면 모든 것들이 오해, 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오렌지의 껍질을 반쯤 벗겨냈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말없이 오렌지를 입에 밀어넣었다. 그러다가 이제와서 그 모든 것들이 오해, 였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아니, 대체 무슨 근거로 우리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믿을 수 있는 건지. 오해, 했다고 짐짓 오해하는게 혹시 더 큰 폭력은 아닌지. 등등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우걱우걱 오렌지를 씹어 먹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도 생각을 해야하고, 말을 해야 하고, 또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처 정돈되지 못한 싱크대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마음의 숙제들, 또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상한 마음이 채 아물기도 전에, 그렇게 아침이면 눈을 뜨고 무언가를 주섬주섬 챙겨먹고 머리를 감고 어김없이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런 혼잡한 길을 따라 각자의 출근을 서두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밤 사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적어도 내 주위의 세계는 그럭저럭 평안을 유지하고 있으며, 누군가와의 점심 약속과 해야할 일이 있다는 그런 소소한 사실들에 안도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 못한 말들과 듣지 못한 말들, 그 모든 말들의 빈틈에 대해 생각했다. 그 비어있던 공간을, 허공을 부유하던 말들을, 서로 가닿지 못하던 마음들을 떠올렸다. 감히 오해, 라고 이름 붙이기 부끄러울 만큼, 너무나도 앙상했던 관계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즈음 나는 얇은 실 몇 가닥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양복 아랫단추를, 끝내 고쳐 달았었다. 그래. 그랬었지. 단추를 고쳐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었다. 버릇을 고치는 일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무서운 일이었다. 빙빙 돌려가면서도 미처 꺼내지 못했던, 그런 무수한 단어들의 조합이 못내 아쉽고, 미안해졌다.

비가 내린다. 어제는 만우절, 이었고. 지난 주말에도 남쪽에는 비가 내렸었다. 구두가 온통 젖어 못쓰게 됐다. 전화기 한 대를 새로 마련했고, 몇 가지의 자잘한 물건들을 더 주문했다. 주소록을 뒤적이다가, 휴대폰 주소록에만 남아있는 이들에게 어딘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새 전화번호를 알리려던 계획은 일단 다음으로 미뤄두었다. 새 전화기에 익숙해질때 쯤이면, 아마 조금은 상황이 나아질지 모른다는, 그런 도무지 아무런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기대를 잠시 해보기도 했다. 혼자 피식 웃어버렸다.

머리카락은 꾸준히 자라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내 표정없는 얼굴이 무색할 만큼, 모든 것들은 아무렇지 않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며, 터벅터벅 화장실을 나섰다. 허무하고, 또야속했다. 밝게 웃으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 열정인지 열심인지 아니면 가식인지 모를, 혹은 그게 뭐라고 하더라도 상관없을, 그런 말들을 뜨겁게 내뱉는 사람들, 부지런히 제 손을 흔들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몸부림치던 그들. 그 모두에서 나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잠을 좀 자야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쨌든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조금 더 태연하게 그런.


Thursday, 29 March 2012

짬뽕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고, 출근이 조금 빨랐을 뿐이었다. 평상시, 라고 부를 만한 그런 날들에 비해 많이 걸었고, 적게 먹었다는 것 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강로 어디 쯤에선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 그 차의 뒤 꽁무니에 크게 경적을 울려주지 못한 것도, 유난히 소리가 큰 내 차의 경적이 갑자기 벙어리가 된 것도, 순간 내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던 것도,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화가 났다. 대상과 방향을 잃은 나의 분노에, 나는 주먹을 내리치며 어쩔줄 몰라했다. 차라리 소리를 질렀으면 나았을까. 크게 소리를 질러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온 세상을 쿵쿵 울릴 듯, 노래를 크게 틀어놓았던 차 안에서도, 나는 소리 한 번 지를 생각을 하지못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맵기로 소문난 짬뽕집으로 차를 돌렸다. 더럽게 맵네. 절반도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놓았다. 계산대에 선 점원은 '속이 쓰리면 우유를 먹으라'는 등의 충고를 늘어놓았다.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누구를 위해 핸드폰은 울렸나. 아무때나 문자와 메일을 쏘아대는 누군가가 원망스러웠다. 누가 어디에서 무슨 말을 했다는, 누가 어디에서 무엇을 할 거라는, 그런 문자나 메일 따위가 지금 내 눈에 들어올리 없잖아, 하고 대꾸하고 싶어졌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전화기를 하나 더 장만해야 겠다는 오랜 결심을 실행에 옮겨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전화기는 쉬지 않고 소리를 질러댔다.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엄마의 전화를 받고, 한참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엄마의 목소리에 묻어났던 어떤 시간들이, 마음을 후벼팠다. 아팠다. 엄마에게 좀 더 전화를 자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밥은 뭘 먹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문자를 보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많이 걸었고, 많이 들었다. 그에 비해 생각은 많이 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의 지치지 않는 걸음걸이 말고도, 나를 부끄럽게 했던 건 많았다. 오늘 그와 함께 걸으며, 알게모르게 내 마음은 가시밭길을 걸었던 것 같다. 마침 그 곳이 온수역이었다는 점도, 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어느 것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보였다. 우울하고 슬픈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잘 된 일이었을까. 짬뽕 국물과 함께 모든 것들이 희미해져 갔다.

내일은 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아마 더 많이 걷게될 것 같다. 내일은 차를 가지고 나가지 않을 생각이다.


Wednesday, 28 March 2012

-



퇴근길, 두 번이나 나는 경적을 울려댔다. 한 번은 택시, 한 번은 버스였다. 깜박이도 안넣고 눈치없이 끼어들게 뭐람. 오른 손에 든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가 출렁였다. 나는 경적을 울렸고, 그들은 잠시 비상등을 깜박이는 것으로 반응했다. 순간 깜박이를 왜 넣는 거냐는 질문과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을 떠올렸다. 아마 늦은 밤, 고속도로 위에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일련의 노래들이 흘러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내 오른 손은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 대신 다른 무엇을 붙잡고 있었던 것도 같다. 그래, 그랬던 것 같다.

컴컴한 집으로 들어서자 온갖 무질서가 눈에 띄었다. 어딘지 문득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책과 잡지들, 포장도 채 뜯지 않은채 먼지만 쌓인 우편물들, 시간을 재촉하는 빨간 글씨가 박힌 각종 고지서들, 그리고 아마도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 숫자들로 가득한 영수증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을 때, "aus Bayern" 따위의 글자가 박힌 맥주를 뜯었다. 반 병쯤 마셨을 때, 이번에는 싱크대 위에 널려 있는 그릇들이 눈에 들어왔다. 뭘 먹었단 말인가. 고무장갑을 양손에 끼고, 다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이제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뜨거운 물에 머리를 감고, 세수를 했다. 면도는 하지 않았다.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는 생각처럼 달지 않았다. 하루종일 쓴 입을 다셨던 탓에, 달콤한 무언가를 원했던 나는 실망했다. 그러다가, 점원에게 샷을 하나 더 넣어달라고 말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난,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아니, 어쩌면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는 '엑스트라샷'을 강조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 맛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번에는 '엑스트라 샷'의 아메리카노든, '카라멜 마끼아또'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오늘도 무중력의 시간들을 통과했던 것 같다. 수십 통의 메일과 문자를 읽었고, 누군가의 글을 훑었다. 나도 무언가를 썼던 것 같다. 그밖에 밥을 먹었고, 숨을 쉬었고, 말을 했고, 또 담배를 피웠다. 물을 마셨고, 인스턴트 커피를 두어잔 마셨으며 '엑스트라샷 카라멜 마끼아또'와 바이에른산 맥주를 마셨다. 청소와 설거지를 했고, 노래를 들었다.

오늘을 기록해야 겠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기록한다는 것, 오늘이라는 것. 모두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래. 기록을 남기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테지. 숫자들이 박혀있던 영수증을 다시 들춰본다. 그날 난 거기에서 무언가를 구입했구나. 누군가의 노동의 산물을, 누군가의 미소를, 또 누군가의 시간을. 어쩌면 나는 기억을 샀는지도 몰랐다. 그 공기를, 추억을, 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있음'과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지성사 수업시간이었던 것 같다. 유난히 흰머리가 잘 어울렸던 선생님의 목소리와 표정이,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래. 무언가가 있기 전에 '있음'이라는 게 있다고 했었지. 무언가 있으려면 무엇이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할테니까. 무엇이 '없다'는 건, 그래서 아마도 '없음'을 전제하고 있을테지. 순간, 생생했던 기억이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있음'과 '없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과연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맥주를 한모금 들이켰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안부를 잠시 걱정했다. 별 일없이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잠을 자고,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Saturday, 24 March 2012

No man




“No man really knows about other human beings. The best he can do is to suppose that they are like himself.”


John Steinbeck